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당나라 군대 (문단 편집) === [[남북국시대]] [[신라]] 유래설 === 신라가 [[나당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당나라군을 형편없는 약군으로 인식한 것에 유래했다는 설. 위의 고구려 사례는 과정은 좋았을 때도 있었지만 결국 고구려의 멸망으로 마무리 지어졌기 때문에, 당나라를 나당전쟁에서 막아내면서 해피엔딩으로 마무리지어진 신라에서 이런 인식이 생겨났다는 설이다. 지금이야 각국의 군사력을 객관적으로 파악이 가능할 정도로 정보가 충분하기에 당시의 당군이 질적으로 크게 떨어지는 군대가 아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정보의 양과 질이 충분하지 않았기에 피상적으로 [[베트남 전쟁|대국인 당나라가 신라에게 패했으니,]] 신라 입장에서는 당나라의 군대 이미지는 실제와 관련없이 형편없는 오합지졸로 인식했을 개연성도 충분하다. 게다가 실제와는 무관하게 적을 조롱하는 문화는 그리 드문 게 아니기 때문. 신라 [[신문왕]] 시기인 692년에 당나라의 요구를 공공연히 거절한 것은 전쟁 직후 신라 측의 여유를 나타낸다. 또한 그 후 세월이 지나며 나당전쟁을 겪지 못한 후세의 신라인들이 [[안사의 난]], [[황소의 난]] 등에서 당나라 정부군이 무력하게 패배하고 이민족이나 의용병의 힘으로 겨우 안정을 찾은 것을 [[황해]] 바다를 건너오는 소문과 [[자치통감]] 등 중국 사서를 통해 접하면서 당나라 군대에 대한 이미지는 더 악화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819년 [[이사도]]의 난 때는 [[당헌종]]의 요청으로 신라 [[헌덕왕]]이 당나라에 바다 건너 지원군을 파병할 정도였다. 현대에 비유하면 미국에서 반란이 일어나 한국이 태평양을 건너 지원군을 보내는 셈이었으니, 이쯤 되면 신라인들이 충분히 당나라의 상황을 조롱할 만한 상황이 된 것. 신라군도 몇백년이 지나 [[후삼국시대]] 직전까지 가면 약군이 되기는 하지만, 당나라가 [[안사의 난]]으로 골골거리기 시작할 8세기 때 신라는 여전히 전성기였고 9세기 초반까지도 [[김헌창의 난]]을 정부군으로 신속하게 진압하는 등 신라보다는 당나라가 더 일찍부터 쇠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